이상한 선생님(위기~) - 채만식
[3장] - 위기
해방이 되던 바로 그 이튿날이었다.
여름 방학으로 놀던 때라, 나는 궁금하여서 학교엘 가 보았다. 다른 아이들도 한 오십 명이나 와 있었다.
우리는 해방이라는 말은 아직 몰랐고(서술자가 세상 물정에 어두운 어린아이이기 때문), 일본이 전쟁에 지고 항복을 한 것만 알았다.
선생님들이, 그중에서도 뼘박 박 선생님이, 그렇게 일본(우리 대일본 제국)은 결단코 전쟁에 지지 않는다고, 기어코 전쟁에 이기고 천하에 못된 미국, 영국을 거꾸러 뜨려 천황 폐하의 위엄을 이 전세계에 드날릴 날이 머지않았다고(일본을 맹신하며 추종했던 박 선생님의 친일적인 태도가 드러남),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런 말을 해쌓던 그 일본이 도리어 지고 항복을 하다니,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직원실에는 교장 선생님과 두 일본 선생님 그리고 뼘박 박 선생님과 이렇게가 네 분이 모여 앉아서 초상난 집처럼 모두는 코가 쑤욱 빠져('코가 빠지다' : 근심에 싸여 기가 죽어 맥이 빠지다) 가지고 있었다. (일본이 패망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은 박 선생님의 모습이 기가 죽고 맥이 빠져 있음)
우리들은 운동장 구석으로 혹은 직원실 앞뒤로 끼리끼리 모여 서서 제가끔 아는 대로 일본이 항복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6학년에 다니던 우리 사촌언니 대석이가 몇몇 동무와 함께 떨떨거리고 달려들었다. 대석 언니는 똘똘하고 기운 세고 싸움 잘하고, 그러느라고 선생님들한테 꾸지람과 매는 도맡아 맞고, 반에서 성적은 제일 꼴찌인 천하 말썽꾼이었다.
대석 언니네 집은 읍에서 십 리(약 4km)나 되는 곳이었고, 그래서 오늘 아침에야 소문을 들었노라고 했다.
대석 언니는 직원실을 넘싯이 넘겨다보더니 싱긋 웃으면서 처억 직원실 안으로 들어섰다.
(박 선생님과 일본 선생님들을 골리려고)
직원실 안에 있던 교장 선생님이랑 다른 두 일본 선생님이랑은 못 본체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뼘박 박 선생님이 눈을 흘기면서 영락없이 일본말로
"난다(왜 그래?)?"
하고 책망을 했다.(대석 언니를 못마땅해하는 박 선생님의 심리가 드러남)
대석 언니는 그러나 무서워하지 않고 한다는 소리가
"선생님, 덴노헤이까가 고오상(천황 폐하가 항복) 했대죠?" (일본을 맹신하던 박 선생님을 놀리려는 말)
하고 묻는 것이었다.
뼘박 박 선생님은, 성을 버럭 내어 그 큰 눈방울을 부라리면서 여전히 일본말로
"잠자쿠 있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건방지게."
하고 쫓아와서 곧 한 대 갈길 듯이 을러댔다. (일본이 패망한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선생님의 심리가 드러남)
대석 언니는 되돌아 나오면서 커다랗게 소리쳤다.
"덴노헤이까 바가(천왕 폐하 망할 자식!)!"
"......"
만일 다른 때 누구든지 그런 소리를 했다간 당장 큰일이 날 판이었다. 그러나 교장 선생님이랑 두 일본 선생님은 그대로 못 들은 척 코만 빠뜨리고 앉았고, 뼘박 박 선생님도 잔뜩 눈만 흘리고 있을 뿐이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일본이 항복했기 때문에) 그런 걸 보면 정녕 일본이 지고, 덴노헤이까가 항복을 했고, 그래서 인제는 기승을 떨지 못하는 모양인 것 같았다.(일본이 패망한 것을 비아냥거리는 대석 언니의 태도가 못마땅하지만, 일본이 패망한 상황이어서 기가 죽었기 때문에 선생님들은 대석 언니에게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음)
마침 강 선생님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헐떡거리고 뛰어왔다. 강 선생님은 본집이 이웃 고을이었다.
"오오, 느이들도 왔구나. 잘들왔다. 느이들두 다들 알았지? 조선이, 우리 조선이 해방이 된 줄 알았지? 얘들아, 우리 조선이 독립이 됐단다, 독립이! 일본은 쫓겨가고...... 그 지지리 우리 조선 사람을 못 살게 굴고 하지하고 피를 빨아먹고 하던 일본이, 그 왜놈들이 죄다 쫓겨가고(일본에 대한 강 선생님의 부정적 인식이 드러남), 우리 조선은 독립이 돼서 우리끼리 잘 살게 됐어, 잘 살게." (조선의 독립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강 선생님)
의젓하고 점잖던 강 선생님이 그렇게도 들이 날뛰고 덤비고 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조선이 독립한 것에 감격했기 때문에)
"자아, 만세 불러야지 만세. 독립 만세, 독립 만세 불러야지. 태극기 없니? 태극기, 아무도 안 가졌구나! 느인 참 태극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도 못 했을 게다. 가만있자, 내 태극기 만들어 가지고 나올게."
그러면서 강 선생님은 직원실로 들어갔다.
강 선생님이 직원실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교장 선생님이랑 두 일본 선생님은 인사를 하려고 풀기 없이 일어섰다.
강 선생님은 교장 선생님더러 말을 하였다.
"당신들은 인제는 일없어(소용이나 필요가 없어). 어서 집으로 가 있다가 당신네 나라로 돌아갈 도리나 허우."
"......"
아무도 대꾸를 못 하는데, 뼘박 박 선생님이 주저주저하다가
"아니, 자상히(찬찬하고 자세히) 알아보기나 하고서......"
하니까 강 선생님이 버럭 큰 소리로 말한다.
"무엇이 어째? 자넨 그래 무어가 미련이 남은 게 있어 왜놈들하고 대가리 맞대고 앉아서 수군덕거리나? 혈서로 지원병 지원 한 번 더 해 보고파 그리나? 아따, 그 다니 애닯거들랑(마음이 안타깝고 쓰리거든, 애달프다) 왜놈들 쫓겨가는 꽁무니 따라 일본으로 가서 살지 그러나. 자네 같은 충신이면 일본서두 괄시는 안 하리." (박 선생님의 친일적인 태도를 비판하는 강 선생님)
"......"
뼘박 박 선생님은 그만 두말도 못 하고 얼굴이 벌개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뼘박 박 선생님이 남한테 이렇게 꼼짝 못 하는 것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적극적으로 일본에 협력하였기 때문에 일본이 패망한 이후 남 앞에서 이제는 당당할 수 없었음)
강 선생님은 반지(얇고 흰 일본 종이)를 여러 장 꺼내 놓고 붉은 잉크와 푸른 잉크로 태극기를 몇 장이고 그렸다. (학생들에게 태극기를 나눠 주려고) 그려 내놓고는 또 그리고, 그려 내놓고 또 그리고, 얼마를 그리면서, 그러다 아주 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로( 박 선생님에 대한 화를 어느 정도 가라앉혔음)
"여보게 박 선생?"
하고 불렀다. 그러고는 잠자코 담배만 피우고 앉아 있는 뼘박 박 선생을 한 번 돌려다보고 나서 타이르듯 말했다.
"내가 좀 흥분해서, 말이 너무 박절했나 보이. 어찌 생각하지 말게...... 그리고, 인제는 자네나 나나, 그동안 지은 죄를 우리 조선 동포 앞에 속죄해야 할 때가 아닌가? (강 선생님은 박 선생님처럼 일제에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선생님으로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음)
물론 이담에, 민족이 우리를 심판하고 죄에 따라 벌을 줄 날이 오겠지. 그러나 장차에 받을 민족의 심판과 벌은 장차에 받을 민족의 심판과 벌이고, 시방 당장 조선 민족의 한 사람으로 할 일이 조옴 많은가? 우리 같이 손목 잡고 건국에 도움 될 일(해방된 조국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세. 자아, 이리 와서 태극기 그리게. 독립 만세부터 한바탕 부르세." (박 선생님을 회유하려고 함)
"......"
뼘박 박 선생님은 아무 소리도 않고 강 선생님의 옆으로 와서 태극기를 그리기 시작했다. (박 선생님이 일본이 패망한 현실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음)
[핵심정리] *해방 소식에 박 선생님은 일본 선생님들과 직원실에 모여 앉아 초상난 집처럼 근심에 싸여 기가 죽고 맥이 빠져 있었지만 강 선생님은 평소와 다르게 들이 날뛰면서 기뻐하고 있음 *일본이 패망한 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박 선생님의 친일적인 태도를 비판하기 위해 강 선생님이 박 선생님을 큰 소리로 꾸짖음 *조선의 독립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강 선생님과 달리 박 선생님은 일제에 동조하고 일본을 찬양하였기 때문에 박 선생님은 강 선생님에게 꼼짝을 못함 |
[어휘정리] *위엄 : 존경할 만한 위세가 있어 점잖고 엄숙함 *언니 :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이이거나 일가친척 가운데 항렬이 같은 동성의 손위 형제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로, 여기서는 '형'을 뜻함 *영락없이 : 조금도 틀리지 아니하고 꼭 들어맞게 *본집 : 본래 살던 집 *하시하구 : 남을 얕잡아 낮추고 *풀기 : 드러나 보이는 활발한 기운 *괄시 : 업신여겨 하잖게 대함 *박절 : 인정이 없고 쌀쌀함 |
* 다음 포스팅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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